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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몰랐던 재미있는 역사 불편한 한국사 신간 도서 추천

Lawrence 0 32

부산고구려$ Ⅰ. 들어가면서Ⅱ. 가야권역의 도굴 및 문화재 국외 유출의 시작Ⅲ. 고적조사에 따른 가야권역 문화재 반출1. 초기 정찰적 성격의 한국 조사와 이에 따른 문화재 반출2. 1909년부터 1915년까지의 고적조사와 이에 따른 문화재 반출3. 1916년 이후 해방 때까지의 고적조사와 이에 따른 문화재 반출Ⅳ. 골동상 및 수집가들에 의한 가야권역 문화재 반출1. 초기 가야권역의 골동상 등장2. 가야권역의 고미술품 수집가3. 해방 직후의 문화재 반출Ⅴ. 맺음말 Ⅰ. 들어가면서 가야권역의 문화재는 한말 이후 해방 전까지 일제의 야욕과 관련하여 철저하게 파괴 또는 외지로 유출되었다.일제가 이 땅을 밟은 이후 상인, 정치인, 무뢰배들은 경쟁적으로 몰려와 우리 문화재를 약탈 대상으로 삼았으며,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진출한 무뢰배들에 의한 도굴행위는 지하의 영혼마저 거침없이 유린했다.또한 일제는 한국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면서 동시에 한국에 대한 학문적 관심도 크게 확대되었다. 청일전쟁 후에는 그 전과는 달리 일본의 대륙정책이 한국을 강점하는 방향으로 굳혀졌기 때문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국 병탄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한국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과 한국은 오래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연구는 극히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국권침탈이 이루어지자 한국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작업과 아울러 각 분야를 보다 세밀히 알아서 한국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단계로 고적조사사업이 본격화 되었다. 한국에 대한 지배 강화와 그들의 학문적 욕구 충족을 위한 고적조사는 이 땅을 그들의 실험무대로 만들었다. 일본인들이 이 땅에 고적조사의 첫 삽을 뜨면서 고대 역사의 증징자료를 그들의 편의에 따라 활용함으로서 상당한 후유증을 낳게 했다. 그들이 우리나라 유적을 발굴함에 있어서 우리의 우수한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말살시키고 침략에 필요한 방편자료와 이미 정해진 자기네들의 역사관에 합리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사 과정에서 출현한 엄청난 유물과 각종 자료를 그들의 연구 자료로 반출한 예가 상당하다. 골동상이나 수집가들에 의해 막대한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심지어는 각종 기증・헌납의 형식으로 건너간 것도 상당량에 이른다. 총독부 등 관권에 의한 무단 반출도 상당하다 할 수 있다. 종전 후 패전국은 모든 재산을 피해자국에 두고 귀국해야 마땅한 일이나 해방 직후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그들은 소장했던 문화재를 상당수는 그대로 가지고 떠났다. 이런 반출로 일본은 국외유출 한국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 대부분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소유하고 반출한 것이다. 이같이 파괴 반출된 문화재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일본인들이 행했던 불법적 행위와 고적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으로 유출된 배경과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할 수 있다. 본 내용은 우리 문화재 환수에 가장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는, 개항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 일본인들이 가야권역에서 자행한 문화재 반출의 불법성과 그 경로를 재조명하는 입장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Ⅱ. 가야권역의 도굴 및 문화재 국외 유출의 시작 우리나라는 예부터 조상들의 무덤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죄악으로 취급했으며, 무덤 속의 부장품은 악귀를 불러온다고 하여 집안에 들여놓는 일조차 멀리했다. 그러나 일본인이 이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무덤 속에 있는 부장품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경제적 이익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악행이 계속되었다. 구한말 이후 일본인들이 처음 도굴을 자행한 곳은 과연 어느 지역이었을까?2004년에 발간한 『도쿄국립박물관 도판목록』을 보면 1879년에 마찌다 히사나리(町田久成)가 ‘기증’한 삼국시대의 배(杯) 및 개(蓋)가 보이고 있다. 당시는 일본의 박물관이 문부성에 속해 있던 시기로 진열관 자체가 소규모였던 시기이다.① 이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 건너간 삼국시대 토기가 일본의 초대 박물관장 역을 맡은 마찌다의 손을 거쳐 1879년에 박물관에 ‘기증’된 것이다. 박물관에 입고된 시기가 1879년이지 이것이 언제 한국에서 건너갔는지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1879년 이전에 건너갔을 것이다.이를 보면 개항과 더불어 건너온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이 자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개항장은 엄격히 규제하여 조계(租界)를 벗어나 개인적인 사무역(私貿易)을 할 수 없도록 되었으나,② 약삭빠른 장사꾼들은 몰래 빠져나와 밀매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 처음 도굴이 시작되었다.③ 그런데 1879년에 일본의 박물관에 들어간 삼국시대의 토기는 상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값나가는 물건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 하잘 것 없이 보이는 토기 조각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류지를 벗어난 상인들의 눈에 띠었다 한들 과연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 즉 이를 필요로 하는 자들의 사주(使嗾)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이 삼국시대 토기는 반출 경로가 명확하지 않지만 경상도 지역에서 도굴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물증 자료라 할 수 있다.④이후 일본의 박물관(당시 공식 명칭은 제국박물관)에서 한국 유물을 최초로 ‘구입’한 것은 1885년으로 경주, 김해 등지에서 출토된 여러 건의 유물들이 보이고 있다. “최초로 일괄 구입”했다고 하는데, 경주 월성 출토품 15건의 신라토기와 동시에 경남 김해 발굴의 석족 3건, 옥류 6건, 금환 1건, 마탁 1건, 령 1건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⑤ 당시 농상무성 박물국에서 구입한 것이라 한다. 이때는 미술 고고학 분야의 학자들이 한국에 진출하기 훨씬 전으로 한국에 진출한 도굴꾼들에 의해 출토된 유물들로 추정된다. 『황성신문』 1905년 10월 3일자에는 「유제실박물관기(游帝室博物舘記) 二)」라는 기사가 있다. 이는 당시 황성신문 기자가 도쿄제실박물관(도쿄국립박물관)의 진열관을 관람하고 쓴 관람기이다. 제10실과 제12실에 진열한 유물 중에서 조선 유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품이라는 것은 개역(皆亦) 고분묘 중의 굴취물(掘取物)로, 와감(瓦坩), 와완(瓦盌), 와배(瓦盃) 등 89종 즉 선산지역에서 파낸 것, 기타 도검(刀劒), 많은 옥속(玉屬)의 김해에서 굴(掘)한 것, 기타 도기(陶器) 15종은 경주 반월성에서 소취(所取)한 것이라 한다. 이 내용을 보면, 『동경국립박물관도판목록』(2004)에서 해설한 김해, 경주지역에서 구입했다는 유물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1905년 당시에는 진열품에 대해 출토지를 밝히는 해설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유제실박물관(2)」의 내용은 이 해설문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도굴품임이 틀림없다. 이외에도 『동경인류학회잡지』제141호(1897)에 시마무라(島村孝三郞), 하야시(林若吉), 이소베(磯部武者五郞) 등이 기증한 도쿄제국대학 소장의 삼국시대 토기가 스케치에 의해 소개되었다. 『동경인류학회잡지』제150호(1898년), 161호(1899년)에 하야시(林若吉), 히라타(坪井正五郞), 도키(土岐僙), 이소베(磯部武者五郞) 소장의 삼국시대 토기가 스케치에 의해서 소개되었다.⑥ 그리고 1900년에 간행한 『동경인류학회잡지』(제15권 166호,167호) 「잡보」‘고바야시(小林)씨의 한국행’에는, 고바야시(小林與二郞)란 자가 부산의 한 우체국에 근무하면서 부산지역에서 출토된 고물을 소개하고 있다⑦고 한다. 개항 이후 허가 없이 거류지를 몰래 빠져나와 밀매를 하던 일본 상인들은 한두 명씩 짝을 지어 강을 따라 김해, 대구, 선산, 상주 등지에서 밀매를 하는 과정에서 도굴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일인들은 처음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나 둘씩 한국에 들어와 상거래(商去來)를 하다가 청일전쟁 직전부터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무리를 지어 대량으로 불량일본인들이 한국에 진출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한국에서 행한 온갖 악행으로 인해 한국인의 원성이 날로 높아갔다. 그래서 1894년 10월에는 칙령(勅令) 제135호로 “문무관(文武官) 기타 관청(官廳)의 명에 의한 자 외의 일본신민은 관할지방청의 허가 없이 조선국에 도항(渡航)하는 것을 금(禁)함”을 내용으로 한 무면허도항자(無免許渡航者)에 대한 금지령을 만들어 이를 적용하고자 했다. 이 같은 금지령은 1894년 10월 18일 제7회 제국의회에 의안(議案)으로 제출되었으나, 칙령(勅令)제135호의 ‘조선국 도항(渡航)에 관한 건(件)’을 귀족원(貴族院)은 승락하였으나 중의원(衆議院)에서 승낙을 거부하여 이 안은 부결(否決)로 처리되었다.⑧ 이 법령은 효력을 상실하고 상인은 물론 장사(壯士), 무뢰한들의 도항(渡航)에 하등의 제약이 없었으며 이를 오히려 장려하기 위해 편리를 도모했다.⑨이로 인해 한국에 건너온 일본의 빈곤자, 무직자, 무뢰한 등 특별한 기능이 없는 이들이 조선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경제수단은 대부분 사기, 협잡, 도굴 등으로 이러한 행위는 어디까지나 일본 군대의 비호 아래 가능했던 것이다.⑩초기 한국에 건너온 일본 관리들이 반출한 유물도 상당수에 달했다. 『제국박물관 공예부 열품목록』(1897년 10월)1897년에 제국박물관에서 발행한 『제국박물관공예부열품목록』⑪에는 당시 박물관에 진열한 품목을 싣고 있는데,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오오이 게이타로(大井敬太郎: 대리공사 花房의 수행원)로부터 기증받은 건이 보이고 있다. 특히 하나부사로부터 대량적으로 한국 유물을 기증 받은 건이 보인다. 그 중의 한국 물품 속에는 경상도 지역의 동래, 양산, 거제 등지에서 반출한 유물들이 보이고 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번호품명출토지형태 1德利조선국 경상도 거제白地無文常備品1개2德利조선국 경상도 거제茶褐色油木葉形付常備品1개3壺경기도 광주요 大井敬太郞 獻品3개4茶器조선국白地朝鮮文字彫常備品1개5茶碗경상도 양산白地無文花房義質 獻品1개6香爐경상도 양산白油蓋銅製鈕獅子常備品1개7茶碗경상도 양산 常備品1개8茶碗경상도 양산淡茶色油堅手石澤武吉 獻品1개9茶碗경상도 양산淡茶色油常備品1개10水入경기도 광주 常備品1개11筆筒경기도 광주 近藤眞鋤1개12筆筒경기도 광주 花房義質 獻品2개13德利경기도 광주 花房義質 獻品1개14壺경상도 동래茶色油花房義質 獻品1개15小皿경기도 花房義質 獻品1개16茶碗경기도 광주 花房義質 獻品4개17壺경상도 동래 近藤眞鋤 獻品1개18茶碗경기도 광주 近藤眞鋤 獻品6개20細口甁고고려 常備品1개21水注경기도 常備品1개46茶碗충청도 청산 近藤眞鋤 獻品3개47茶碗경기도 광주 花房義質 獻品1개48茶碗충청도 청산 花房義質 獻品3개49茶碗경기도 花房義質 獻品6개50壺경기도 광주 花房義質 獻品4개 이들은 모두 1886년 10월에 박물관에 헌납된 유물들이다. 같은 해 1886년에는 곤도 마스키(近藤眞鋤)로부터 도자기를 기증받은 건이 보인다. 곤도 마스키는 1876년 10월 25일(음) 일본 외무성 관리관으로 부산에 부임하여(고종시대사, 개항100년연표), 1880년 2월에는 부산주재 영사에 임명되고, 1887년 8월에는 일본대리공사로 임명되어 1891년까지 재임하였다. 그러한즉 경남일대의 많은 문화재를 반출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으로 나타난 목록은 많지 않다.초기 한국에 건너온 외교 관계자나 통감부 설치 이후 한국에 관계한 관리들은 개인적으로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기도 했으나, 일본의 대학, 학계의 연구 자료수집에 적극 협조하여 대학이나 학계에 자료를 불법 반출했다. 이들은 모두 한국 문화재를 약탈품으로 취급한 것이다. 일제의 약탈자로서의 만행은 1894년에 작성한 「전시청국보물수집방법(戰時淸國寶物蒐集方法)」⑫에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는 ‘요지(要旨)’, ‘방법(方法)’, ‘비용(費用)’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① 도쿄 우에노공원에 위치한 도쿄국립박물관은 1871년 7월 18일에 문부성을 설치하고 문부성관제를 정하여 그해 9월 문부성에 박물국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1872년 10월 1일 문부성 박물국에 의한 박람회가 개최되어 이를 계기로 박물관이 창립되었다. 박물국(博物局)은 박물관과 함께 처음 생겨나게 되었다. 즉 이것이 박물관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명칭은 박물관 또는 박물국이라 불렀다. 국(局)은 사무관장상 사용한 것이고, 관(館)은 진열관의 호칭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帝室博物館. 『帝室博物館略史』, 1938.)1881년에는 농상무성을 설치하고, 내무성의 근업료 및 박물관 기타 사무를 농상무성에서 주관했다. 박물관은 1882년 3월에 신박물관을 우에노공원에 개관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농상무성 관리 하에 두었다. 1886년 3월에 이르러 박물관은 궁내성 소관으로 옮기고 궁내성 도서료에 부속케 했다.(大森金五郞, 「文獻の喪失 文化の破壞」, 『中央史壇』제9권3호, 1924년 9월)② 개항과 더불어 부산에 건너온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의 회고담에 의하면,“1876년 1월 현재의 일본인 호수는 40여 호, 직장이 있는 자와 관리를 합하여 12명, 이 밖에 70여 명의 상인 도합 1백여 명이 못되는 쓸쓸한 환경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거주 제한구역인 초량왜관을 말하는 것이다. 거류일본인들은 자기네 관내의 경비에 종사하고 밤에는 반을 나누어 야경을 하고 낮에는 반을 교대하여 순회함으로써 자위태세를 갖추어 치안을 유지해 나갔다. 거류지의 사방은 성벽으로 둘러싸였고 오늘의 동광동에 있었던 일본제일은행의 북쪽에 수군(守軍)이 있어 한국 군졸들이 아침 5시부터 저녁 6시까지 개문(開門)하여 통행을 허가하고 있었으나 그 통행에게도 감찰이 필요했었고 무역을 할 때에도 낮에는 공무역(公貿易)이라 하여 개인들의 무역은 허가되지 않았다.”고 한다.(林豪淵, 「재계산맥 근세 100년 산업과 인물, 倭館(3)」, 『매일경제』 1981년 10월 13일자에서 재인용.大池忠助의 회고담은 1926년 부산부에서 편찬한 『釜山開港五十年紀念號』에 실려 있다고 한다.)정식으로 釜山口租界條約이 체결되는 것은 1876년 12월로, 『고종실록』 1877년 1월 30일조에는 다음과 같다.〈부산구 조계 조약(釜山口租界條約)〉조선국(朝鮮國) 경상도(慶尙道) 동래부(東萊府) 소관 초량항(草梁項)의 한 구역은 예로부터 일본국 관리와 백성이 거류하는 땅이다. 그 폭원(幅員)은 도면과 같다. 도면 중 옛날 동관(東館)이라고 부르던 구역 안에 적색(赤色)으로 표시한 가옥 3채는 조선국 정부가 지은 것이다.;조선국 정부에서 지은 부산고구려$ 두 채의 건물을 일본국 정부에서 지은 구칭 개선소(改船所) 및 창고 등 여섯 채의 건물과 교환하여 양국 관리와 백성이 사용하도록 한다. 그 밖의 택지, 도로, 개천은 모두 일본국 정부에 귀속시켜 보호하여 수리하고, 선창은 조선국 정부에서 수리하고 보수한다. 따라서 지도를 첨부하고 서로 날인하여 뒷날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한다. 조약문은 이와 같다.대조선국(大朝鮮國) 병자년(1876) 12월 17일동래 부백(東萊府伯) 홍우창(洪祐昌) 인(印)대일본국 명치(明治) 10년 1월 30일관리관(管理官)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 인(印) ③ 정규홍, 『우리 문화재 수난사』, 2005.④ 정규홍 편저, 『구한말・일제강점기 경상도지역의 문화재 수난일지』, 경상북도・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2018.⑤ 「東京國立博物館所藏朝鮮産土器·綠釉陶器の收集經緯」, 『東京國立博物館圖版目錄』朝鮮陶磁篇(土器,綠釉陶器), 東京國立博物館, 2004, p.169.⑥ 早乙女雅搏, 「신라고고학사」, 『일제강점기 신라고분 발굴조사 關聯資料集』,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1, p.19.⑦ 차순철, 「日帝 强占期의 新羅古墳 調査硏究에 對한 檢討」, 『文化財』39호, 2006.⑧ 「帝國議會議案」, 『日淸戰爭實記』,第9編, ‘內外彙報 日本’, 博文館, 明治27年(1894) 11月 17日, p.82.⑨ 「朝鮮渡航者の 便利」, 『日淸戰爭實記』,第9編, ‘內外彙報 朝鮮’, 博文館, 明治27年 11月17日, p.106⑩ 黃玹, 『梅泉野錄』(李章熙 譯, 大洋書籍, 1973, p.288)당시 그들의 威勢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육군대장 長谷川好道가 서울에 주둔하여 사령부를 세우고, 一進會가 이에 뜻을 같이하게 되자 高宗은 그것을 근심하여 뇌물을 보냄이 그치지 않았고 또한 敍勳 할 것을 命하고 李花章까지 주었다. (매천야록, p.287)⑪ 帝國博物館 編, 『帝國博物館工藝部列品目錄』, 帝國博物館, 1897.⑫ 이에 대한 내용은 李進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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